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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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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 Ʈ ÷ α α    2016/12/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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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사시대의 시기구분상 인간이 간석기〔〕를 생활도구로 사용한 시대.

개관

석기시대의 시대구분상 구석기·중석기시대를 이어 나타난 마지막 단계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늦어도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인 홍적세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 홍적세는 기후 변동이 심해 빙하기와 간빙기가 되풀이되었고, 그에 따른 해수면의 변동과 동식물의 분포 변동이 잦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약 1만년 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기후의 극한 변동은 대체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양극지방의 두꺼운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툰드라지역이었던 곳은 삼림지대로 바뀌었고 기후는 전반적으로 보다 온난다습해졌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라 하면, 바로 이 후빙기의 새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을 하게 되어, 그 배경으로 인류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를 말한다.

아주 오랜 기간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경제를 벗어나, 농경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면서 토기 및 간석기를 사용하고 직물기술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문화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실로 인류문화발달사상 새로운 전기를 이룩한 것이었다. 하지만 후빙기 이후의 세계 모든 지역에서 똑같은 농경을 기반으로 한 문화들이 전개된 것은 아니다. 유라시아나 극동아시아 등지에서는 농경이 실시되지는 않았으나, 앞서 말한 신석기적 특성을 지닌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 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문화도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간석기와 토기 등 신석기적 문화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유럽 중심의 개념보다는 넓은 의미로 정의되는 신석기시대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홍적세 이후 최초의 토기 출현으로부터 금속기 사용 이전까지, 주로 어로·수렵·채집에 의해 전개된 토기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다.

한국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문화로 빗살무늬토기문화를 들 수 있다. 토기의 모양은 밑이 뾰족한 포탄형을 하고 있는 것과 밑이 납작한 항아리나 화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토기표면에 무늬를 장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무늬는 빗같이 생긴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누르거나 새겨서 생긴 선 또는 점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무늬모양이나 그릇의 형태가 북방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k)이나, 바이칼 지방, 소련의 연해주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토기들과 유사성이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토기는 캄케라믹이 시베리아를 거쳐서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기라는 명칭도 캄케라믹을 그대로 번역한 데서 유래되었다. 지금까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한반도내 유적은 약 130개소 정도이며 주로 큰 강가·해안·호숫가·섬 등에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은 분포양상만을 보아도 당시 생활이 고기잡이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 유적에서 낚시바늘이나 어망추가 많이 발견되는 점은 다시 이러한 사실을 뚜렷하게 뒷받침해 준다. 한편, 석창이나 돌살촉과 같은 수렵구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수렵에 의한 식량확보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나무열매나 뿌리 등의 채집도 보조수단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인들은 물가의 평평한 사질퇴적지 또는 물가에 가까운 산 경사면에 땅을 파고 들어간 구덩주거지(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주거지가 발굴 조사된 암사동의 경우 4∼5채 정도가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주로 어로 및 수렵·채집에 의존해 전개되었던 신석기문화가 말기에 접어들자, 서해안의 일부지역에서는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 화북지방의 농경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후기의 농경을 입증하는 유적은 아직 1∼2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매우 한정된 지역에 국한된 맹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한국 신석기문화는 어로·수렵·채집에 의해 전개된 문화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는 서기전 63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석기가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전기에 앞서 개시기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고산리유적의 유물들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구석기시대가 끝난 이후 서기전 5000년 무렵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해당하는 확실한 자료도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방사성탄소연대로 측정한 결과, 가장 오래된 서기전 5000년경의 강원도 양양 오산리 하층, 부산 동삼동 하층과 가장 늦은 서기전 1000년경의 경기도 시도유적()을 통해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서기전 5000년경부터 서기전 1000년경까지 약 4000년간 존속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전 1000년 전후에는 본격적인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된 청동기문화의 융성으로 신석기문화의 대부분은 강력한 청동기문화에 그대로 흡수·동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일부 도시지방에서만 그 뒤에도 신석기적 요소를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유물 분포지역

토기는 한국 신석기문화를 규정하는 기준이 될 만큼 다른 어떤 종류의 유물보다도 신석기문화의 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기의 제작과정이나 무늬의 종류는 각 지역, 각 시기의 문화나 사회적 배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므로, 신석기 편년구명에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유적은 주로 동·서·남해안의 세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뚜렷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지역별 토기의 변천양상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전체적인 편년을 보기로 한다.

1. 서해안 지역

한반도 서해안의 대동강·한강 유역과 인접도시에서는 뾰족밑을 기본으로 하는 포탄형의 토기가 이 지역 전통을 이루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토기를 만들기 위해 반죽한 점토에는 운모·석면·활석 등을 섞기도 한다. 무늬는 점과 선에 의한 기하학적 형태가 많다. 무늬의 구성방식은 토기 표면을 위로부터 평행으로 각각 구연부()·기복부()·저부()로 삼등분해 서로 다른 무늬로 장식한 것, 같은 무늬로 장식한 것 또는 부위에 따라 무늬가 생략된 것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구연부 무늬로는 짧은 사선을 평행으로 여러 줄 돌린 것이 가장 많고, 기복부 무늬로는 사선으로 물고기뼈무늬〔〕를 나타낸 것이 가장 많다. 이와 같은 전통을 지닌 토기류를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는 다시 부위별 무늬의 생략 여하에 따라 전시문형()의 Ⅰ류, 저부무늬 생략형의 Ⅱ류, 기복·저부무늬 생략형의 Ⅲ류로 세분된다. Ⅰ류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서울 암사동유적의 경우,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4280±110년, 4100±105년으로 서해안지역 최고의 연대를 나타내며 신석기 전기에 해당된다. Ⅱ류가 주류를 이룬 경기도 소야도조개더미〔〕의 경우, 서기전 1910±42년의 측정결과가 나왔으며, Ⅲ류가 출토된 시도조개더미의 측정치는 서기전 1090±60년으로 나와 각각 서해안 신석기시대의 중기와 후기에 해당되고 있다.

2. 동해안 지역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유역과 강원도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동해안지역에는 납작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토기가 그 지역 전통을 이루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무늬는 토기의 상반부에만 새긴 것이 많으며, 그 종류로는 물고기뼈무늬 외에 번개무늬 같은 특징적인 것도 있다. 근래에는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양양 오산리유적에서 평저유형의 토기류가 출토되어 이 지역이 동북지방과 동일한 전통의 지역문화권을 이루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적의 퇴적상태는 크게 상층·중층·하층의 3개층으로 구분되는데, 하층에서 채집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5100±120년으로 나와 한반도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이고 있다. 한편, 오산리의 중층 및 상층의 연대측정치는 없지만, 중기 및 후기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 남해안 지역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유역과 해안지역에서는 서해안이나 동해안지역과 비교해 각각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토기형식이 혼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덧무늬토기〔〕·지두문토기()·영선동식토기()·태선어골문토기()·겹아가리토기〔〕등이 각각 층서별로 주류를 이루며 나타난다. 그 대표 유적인 동삼동조개더미의 경우, 최하층 조도기()에서는 원시민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 2층의 목도기에서는 지두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그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3940±140년이다. 3층의 부산기에서는 영선동식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2995±125년이다.

4층의 두도기에서는 태선어골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5층 영도기에서는 겹아가리토기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곳의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1450±120년이다. 이상의 각 지역별 편년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전기·중기·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구분

1. 신석기시대 전기

서기전 5000년경부터 약 1,500년 동안의 전기 신석기문화의 예로, 서해안지역에서는 전형적 빗살무늬토기 Ⅰ류가 주류를 이루는 유적들, 동해안지역에서는 구연부에만 무늬를 새긴 평저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오산리하층과 함경북도 서포항(西)Ⅰ을 들 수 있다. 남해안지역에서는 덧무늬토기와 원시민무늬토기의 조도기, 지두문토기의 목도기, 토기 상부에만 누른 무늬를 장식한 영선동식토기의 부산기로 대표된다. 서해안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 Ⅰ류는 구연부와 기복부에 각각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구연부에는 짧은 선을 아래위로 여러 줄 돌리고, 기복부에는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것이 압도적이다. 이러한 토기는 서울 암사동, 광주() 미사리·동막동유적 등 한강 중류지역을 비롯해 대동강변의 궁산리, 봉산 지탑리유적 등 한반도 서북한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한편, 동해안지역의 서포항Ⅰ, 오산리하층, 남해안지역의 조도기·목도기에서는 아직 빗살무늬토기의 표지적인 무늬인 물고기뼈무늬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해안지역을 제외한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의 물고기뼈무늬토기〔〕성행 이전의 시기를 선빗살무늬토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

전기 신석기인의 집자리가 발굴조사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포항,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유적, 남해안의 돌산 송도에서 발견된 주거지와 동삼동 3호 주거지 정도이다. 이들은 강안 또는 해안의 사질퇴적층이나 강안에 면한 경사면을 60㎝ 이상 파서 만든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주거지의 평면은 방형과 원형이 있으며, 20㎡ 내지 30㎡ 규모의 움집이 한곳에 4∼5채 모여 있음이 밝혀졌다. 움집 바닥에는 진흙을 깔고 굳게 다진 뒤 동물 가죽이나 짚을 깔고 살았다. 내부에는 음식 준비와 채난()에 필요한 화덕이 보통 1∼2개 있다. 그리고 큰 항아리의 밑부분을 떼어낸 것을 바닥을 파고 거꾸로 묻은 저장공이 있다.

또한, 출입을 위한 간단한 경사로나 계단시설도 마련되었다. 이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들은 재료에 따라 토기·석기·뼈연모〔〕로 구분할 수 있는데,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토기류이다. 토기는 테를 쌓거나 감아올리는 방법에 의해 성형한 뒤, 600∼700℃의 열을 가해 완성한 것이다. 열을 가할 때 토기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해안지역의 경우 운모나 활석·석면 등을 섞은 것이 있다. 그리고 동해안지역에서는 석영립이나 조개가루를 섞고 있으며, 남해안에서는 섬유질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석기류에는 뗀돌도끼〔〕·간돌도끼〔〕·석창·돌살촉 등이 있다. 돌도끼류는 정착생활에 필요한 필수도구로 벌목이나 목재의 세공 이외에 나무의 뿌리를 자른다든지 할 때에 널리 쓰인 도구이다. 한강변 암사동이나 미사리에서는 뗀돌도끼가 수적으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역석()에 횡위타격()을 가해 타원형의 격지〔〕를 떼어내고 그 주변을 타정()해 제작하였다. 석질은 특별히 일정한 것이 없지만, 현무암·규질점판암·혈암 등이 주로 쓰였다. 특히, 동삼동에서는 규질암제의 반간돌도끼〔〕가 출토되었다.

뼈연모는 재료 자체가 부식이 잘 되기 때문에 조개더미유적 이외에는 잘 남아 있지 않다. 동삼동조개더미에서는 녹각제 작살과 낚시바늘이 출토되어서 어로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암사동·미사리 등 한강유역의 유적에서는 석제 어망추가 다수 발견되어서 그물에 의한 고기잡이도 어로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로생활과 관련해 조개류 채집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된다. 동삼동의 경우 모두 31종의 조개류가 채집되었다. 그것은 현재 해안에서 잡히는 조개류의 거의 전부를 망라하는 셈인데, 특히 굴·전복·소라·우렁이가 많다. 이 중 전복과 소라는 깊은 물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잠수 기술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신석기시대 전기는 주로 어로생활에 전념하면서 수렵이나 채집활동을 병행했던 어로·수렵사회적 성격을 가진다.

2. 신석기시대 중기

신석기시대 중기에는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 빗살무늬토기에 변화가 생겨 시문 면적이 줄어든 구분계 저부문 생략형 토기와, 기복부에 전용 시문되던 물고기뼈무늬가 구연부에까지 시문된 동일계 빗살무늬토기가 성행한다. 동해안 및 서해안지역에서는 물고기뼈무늬가 성행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서기전 3,500년경에서 2,000년경까지 약 1,500년 동안이다.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서해안지역에서는 구분계 저부문 생략형과 동일계 저부문 생략형 토기를 주체로 하는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이 있다. 동해안지역에서는 서포항Ⅱ기층, 그리고 남해안지역에서는 두도기가 있다. 중기 신석기인들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움집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가 되면 유적 수도 증가하며 개별 주거지의 구덩 깊이도 깊어지고 평면도 원형·방형·장방형으로 다양해진다. 최근 조사된 인천 삼목도, 영종도 중산동·운서동, 시흥 능곡, 안산 신길, 용인 농서리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런 마을 유적에서는 기둥이 4개인 방형 주거지가 20동 이상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구조는 돌출식 또는 복도식 출입구가 정연하게 만들어졌다. 생활도구나 생활경제에서도 전기와 큰 차이가 없다. 아직 농경 이전 단계의 어로·수렵에 의존한 사회에 해당된다.

3. 신석기시대 후기

신석기시대 후기는,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 빗살무늬토기가 퇴화되어 구연부에만 시문하게 되며,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도 퇴화·변형되는 시기이다. 이는 서기전 2,000년에서 1,000년까지의 대략 1,000년간이다.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서해안지역에서는 기복부·저부문 생략형 토기가 출토되는 궁산리, 지탑리 상층 및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이 있다. 동해안지역에서는 굴포리 후기층, 그리고 남해안지역에서는 겹아가리토기와 구연부에만 국한해 시문하는 퇴화된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영도기이다. 이 시기 충청도지역에서는 대천리식 주거지라 불리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가 나타나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영동지역에서는 방형 주거지가 유행하고 있으며 고성 철통리에서는 4주 및 2주식 방형주거지로 이루어진 마을유적이 조사되었다. 이밖에 경상남도 합천 봉계리 등지에서는 원형과 장방형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서해안지역에서 생업경제상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지탑리유적에서 피·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제 농경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리고 궁산리에서는 돌가래·뿔가래와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경구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후기에 들어서면 초보적 단계의 전작농경()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어로·수렵에 의한 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사와 전망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일본인 학자 토리이〔〕가 1916년 황해도 용반리유적, 경기도 시도조개더미 등을 조사함으로써 한반도 서해안지역에서 개시되었다. 그 뒤 후지타〔〕·요코야마〔〕·아리미쓰〔〕등에 의해, 1925년 암사동, 1930년 부산 동삼동조개더미, 1932년 동북지역의 유판조개더미〔〕등이 조사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윤곽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까지의 고고학 발굴조사는 주로 역사시대의 고분발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에 관한 것은 수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빈약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의 주된 관심은 한국의 선사시대 토기 중 주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와의 관계구명에 그 초점이 놓여 있었다. 이 두 종류의 토기문화 중 전자가 주로 해안이나 강가 그리고 도서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후자는 주로 내륙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점에 착안해, 이를 동일 인종의 같은 시대에 있어서 생활양식상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빗살무늬토기가 북한지역에 편중된 반면에 민무늬토기가 남한지역에 편재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지역적 차이에서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려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이 두 종류의 토기문화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려는 견해와는 달리, 양자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었다. 그 예로 후지타, 요코야마의 예를 들 수 있다. 후지타는 1930년에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가 북유럽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캄케라믹이 동쪽으로 전파되어 시베리아를 거쳐 유입된 것이라는 내용의 전파설을 제창하였다. 요코야마도 같은 견해로,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의 연해주지역→한국 동북지역→남해안지역→서해안지역의 방향으로 전파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신석기시대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단지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 두 종류의 토기형식만을 설정한 뒤, 설정된 내용의 범위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빗살무늬토기에 관해서도 개개의 유적이나 지역을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해 그 상호간의 선후관계 구명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연구양상은 빗살무늬토기 자체의 선후관계 구명에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 큰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광복 후,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유적 발굴조사가 개시되면서, 남한과 북한에서는 각각 신석기유적에 대한 대규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서해안지역에서는 궁산리·지탑리·암사동이, 남해안지역에서는 동삼동·수가리, 그리고 동해안지역에서는 굴포리 서포항, 양양 오산리유적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특히, 암사동·동삼동·서포항·오산리유적의 발굴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자체의 상호간 선후관계를 보여주는 층위적 증거가 제시되어 신석기시대의 문화변천 양상을 구명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남한지역 발굴조사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응용되어 이제까지 신석기시대에 관련된 것만 해도 50개의 측정연대가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광복 후의 신석기시대 연구에서는 층서관계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빗살무늬토기문화의 편년수립에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확한 편년의 수립 없이는 그 이상의 연구 폭을 넓히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편년상 진전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만, 아직도 해명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먼저 한국 신석기문화의 기원 및 형성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한반도에는 중석기 이후 사람이 살지 않고 있던 상태에서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한국의 신석기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광복 후 신석기유적에 대한 대규모 조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응용결과 약간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서해안지역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의 캄케라믹, 바이칼 지방의 토기와는 기형상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시문방법·무늬구성·제작방법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오히려 한반도 서해안지역의 지역적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토기문화로 생각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도 서기전 5000년대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에, 시베리아 바이칼 지방보다도 더 오랜 연대를 나타내는 셈이 된다. 더구나, 동해안지역의 오산리하층이나 동삼동의 조도기·목도기의 주체를 점하고 있는 덧무늬토기·지두문토기·원시민무늬토기 등은 전형적 빗살무늬토기의 범주에서 벗어난 토기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만 존재하는 선빗살무늬토기문화나 서해안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문화의 기원 및 형성 문제는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와 석기에서 보듯이,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초창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만큼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이과정에 대한 검토와 신석기시대의 시작 시기와 문화상에 대한 문제도 향후 밝혀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는 움집으로서 4∼5채를 단위로 하는 정착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데, 원시농경이나 목축과 같은 안정된 식량생산단계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수렵·채집 등의 낮은 생활수단에 의해 집단정착생활이 영위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조직은 어떠하였으며 주변지역의 고대 민족들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 등의 문제들도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광복 후 신석기시대의 편년수립은 그 나름대로의 의의가 크지만, 아직 층위적 근거가 약한 편이며, 토기 및 석기의 용도 문제 등도 또한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요한 과제들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제시된 여러 과제들이 앞으로 정밀한 학술발굴조사에 의한 기본자료의 축적과 인접 과학분야와의 협력 하에 해결되어 나갈 때, 한국 신석기문화의 양상은 보다 폭넓고 깊게 밝혀질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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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수가리패총」(정징원 외,『부산대학교박물관유적조사보고』4, 1981)
  • 「즐목문토기」(한병삼,『세계도자전』17, 소학관, 1979)
  •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질그릇 갖춤새 변천에 보이는 문화발전의 고유성」(김용간,『고고민속론문집』7, 1979)
  • 「한반도 중서부지방의 신석기문화」(한영희,『한국고고학보』5, 1978)
  • 「서포항원시유적발굴조사보고」(김용간·서국태,『고고민속논문집』4, 1972)
  • 「시도패총」(한병삼,『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8, 1970)
  • 「한국기하문토기문화의 연구」(김정학,『백산학보』4, 1968)
  • 「암사리유적의 토기·석기」(김원룡,『역사학보』17·18, 1962)
  • 「지탑리원시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학연구소,『고고민속학연구소 유적발굴보고』8, 1961)
  • 「궁산원시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학연구소,『고고민속학연구소 유적발굴보고』2, 1957)
  • 「韓國櫛文土器の展開」(任孝宰,『末盧國-佐賀縣唐津市ㆍ東松浦郡の考古學的調査硏究-』, 1981)
  • 「朝鮮櫛目文土器の硏究」(有光敎一,『京都大學考古學叢書』3, 1962)
  • 「櫛目文土器の分布に就いて」(藤田亮策,『靑丘學叢』2, 1930)
  • Han River chulmuntogi(Nelson, S. M., Occasional Paper No.9, Program in East Asia Studies, Western Washington State College, 1975)
  • Tongsamdong:A contribution to Korean Neolithic Culture History(Sample, L. L., Artic Anthropology 11, 1974)

    [네이버 지식백과] 신석기시대 [Neolithic Age, 新石器時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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