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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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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할때 왜 뜨거운물로 손을지 않을까
īī丮 Ʈ  ̽      2016/12/30 20:44
https://cafe.fmebs.com/blog_blog/postview.asp?b_id=didqhdls1186&idx=667 
 

수술할때 왜 뜨거운물로 손을 싰지 않을까

보통은 소독할때 뜨거운물을 쓰니깐 수술할때도 손을 뜨거운물에

싰지않을까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그이유는 세균때문에 손을 뜨거운물로 싰지안는다고 그랬다.

세균은 뜨거운물에 번식돼기 쉬워서 뜨거운물애 손을싰지않는 다했다.



 

1   α ũϱ
빗살무늬 토기
īī丮 Ʈ  ̽      2016/12/28 18:05
https://cafe.fmebs.com/blog_blog/postview.asp?b_id=didqhdls1186&idx=658 
 
[ ─ ]
이칭별칭 즐목문토기, 유문토기, 어골문토기, 기하학문토기
유형유물
시대선사/석기
성격토기
소장처경희대학교 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작시기·일시신석기시대
재질흙, 돌
관리자경희대학교 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정의

그릇 표면을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점·금·동그라미 등의 기하학무늬를 나타낸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개설

‘즐목문토기()’라고도 한다. 또한 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있기 때문에 ‘유문토기()’라고도 하며, 무늬 모양의 특징을 따서 ‘어골문토기()’ 또는 ‘기하학문토기()’라고도 부른다.

내용

토기의 일반적인 형태는 바닥면이 포탄모양으로 뾰족한 첨저형()과 편평한 화분모양의 평저형()의 두 종류가 있다.

1. 첨저형 토기

첨저형 토기는 바탕흙인 점토를 빚어서 만들 때 운모()를 섞었으며,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를 제작하는 방법에는, 반죽한 점토를 일정한 크기의 반지모양의 테로 만들어 쌓아 만드는 법, 길고 납작하게 만든 점토띠를 아래로부터 위로 감아 올려 만드는 법, 점토 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눌러 빚어 토기모양을 만드는 법 등 3가지 방법이 있다.

토기 겉면에는 1개 또는 여러 개의 이가 달린 무늬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무늬를 새겼다. 토지 겉면을 평행으로 3등분해 위로부터 구연부·기복부·저부로 나눌 때, 각 부분에 각각 다른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 많다.

구연부를 장식하는 주요무늬로는 평행밀집사단선문()·점렬문()·사격자문() 등이 있으나 평행밀집사단선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복부에는 평행사선을 어긋나게 그은, 마치 물고기뼈모양의 어골문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저부에는 평행사선문 또는 어골문 등으로 시문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구연부의 평행밀집사단선문과 기복부의 어골문이 결합한 형태가 수적으로 가장 많다. 또 이러한 구연부문과 기복부문의 사이에 파상점선문()과 같이 곡선으로 된 특징있는 문양이 끼어 있는 것도 있으나 수적으로 많지는 않다.

이와 같이 토기의 각 부분마다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되는 종류 외에, 한 가지 무늬로 토기 겉면의 전체 또는 부분을 장식하는 종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앞에서 기복부에 가장 많이 새겼던 어골문으로 겉면 전체 또는 일부를 장식하는 예가 많다.

2. 평저형 토기

평저형토기에는 바탕흙에다 돌을 모래알 만하게 잘게 부숴 섞어 만든 것이 많으며, 수적으로는 적으나 조개가루를 섞은 것도 있다. 토기의 색은 갈색이나 흑갈색계통이 대부분이며, 토기 겉면을 반들반들하게 갈아서 광택이 나는 것도 있다.

무늬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생긴 선과 점을 배합해 토기 겉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토기 겉면의 상반부에 한해 무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무늬 종류로는 첨저형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일반적인 무늬 외에 번개무늬와 같이 특징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는 섭씨 600°∼700℃ 정도의 열을 가해 구운 것이다. 토기를 구워낸 가마자리가 확인된 곳은 없지만,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워낸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크기에 따라 각각 달라, 현재의 독과 같은 대형은 저장용으로, 중형은 취사용으로, 소형은 식기나 음식 준비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3. 분포지역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토기는 핀란드, 스웨덴 남부, 북부 독일, 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지방에서 오카강·볼가강 상류지방에 걸친 북유럽 일대, 우랄산맥을 넘어서 오브강·예니세이강유역 일대, 바이칼호지역, 몽고지방, 연해주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토기도 빗같은 무늬새기개의 끝으로 눌러서 새기고, 그어서 생긴 선으로 토기 겉면을 장식하고 있고, 토기의 기형면()에서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동일계통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는 135개에 달한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고 주로 해안가·강가 그리고 도서지방에서 발견된다.

크게는 대동강·한강을 포함한 서해안지역, 낙동강을 포함한 남해안지역, 두만강을 포함한 동해안지역의 3개 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지역군 사이에는 뚜렷한 지역차가 있다.

서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는 뾰족 밑을 기본으로 하는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된 반면, 동해안지역에서는 납작 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되어 있다.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해안지역에서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서울특별시 암사동,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 경기도 부천군 시도() 패총 등이 있고, 남해안지역에서 부산광역시 동삼동패총, 경상남도 김해군 수가리 패총 등이 있다.

한편,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동해안지역에서는 함경북도 무산군 서포항(西)패총,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빗살무늬토기는 해안변의 패총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며, 강변의 경우는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는 기형이나 무늬 수법으로 보아 시베리아지방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북유럽의 핀란드, 북부 독일 일대에서 번영했던 캄케라믹(Kammkeramik, )이 동으로 전파되어 시베리아를 지나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견해로, 그 중계지역으로서 바이칼호지역이나 연해주지역이 유력시된다.

전래경로는 먼저 연해주지방에서 한반도 동북해안으로 유입되어 동해안을 따라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와 시베리아토기와는 제작방법, 문양의 구성방법 등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점이 크며,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가 연해주보다 더 오래된 연대를 보이고 있는 점을 들어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자생() 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토기 중 가장 오랜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4000년경이고, 늦은 연대는 서기전 1000년경이다. 이와 같이 3천년 이상 존속했던 빗살무늬토기시대를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할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빗살무늬토기도 변천된 것으로 판단된다.

첨저형 빗살무늬토기의 전기의 토기는 구연부와 기복부에 각각 다른 문양요소로 토기 겉면 전체에 시문된 것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 기복부에는 어골문이 배합되어 시문된 것이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무늬를 시문하는데 각 부위별 문양요소의 선정에 엄격한 규율이 작용됐던 결과로 생각된다.

중기의 토기는 구연부와 기복부에 각각 다른 문양으로 시문된 것은 전기와 마찬가지이지만, 저부의 문양 시문이 생략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기복부에 새겼던 어골문을 구연부까지 계속해서 장식함으로써 동일한 문양으로 시문하는 종류가 많아지는데, 여기서도 저부의 문양 시문이 생략된 것이 많다. 이것은 전기의 전면 시문 전통이나 부위별 문양선정의 엄격한 규율이 부분적으로 붕괴된 결과에서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후기의 토기는 구연부에만 무늬를 새기고 나머지 부분의 시문이 생략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전기 이후의 전통이나 규율이 쇠퇴해 구연부 일부에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결과로 생각된다.

평저형 빗살무늬토기도 그 나름대로의 전통을 가지고 변천되었다. 전기간을 통해 토기의 구연부에만 시문하는 전통이 지속되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기복부에 어골문을 시문한 것이 나타나며, 후기에는 번개무늬와 같은 특징 있는 문양도 시문되었다.

의의와 평가

출토유적의 분포양상이나 반출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빗살무늬토기 사용인은 원시농경 실시 이전 단계인 어로·수렵·채집경제에 의해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빗살무늬토기의 성격이나 변천과정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문화내용이나 편년설정 규명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에 번영했던 빗살무늬토기도 서기전 1세기 전후에는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문화의 융성으로 대부분은 무문토기에 흡수, 동화되어 버렸다. 일부 도서지방 같은 곳에서는 그 문화의 전통을 보다 오래 이어가다가 점차 쇠퇴해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즐목문토기」(한병삼, 『세계도자전집』17, 1979)
  • 「한국기하문토기의 연구」(김정학, 『백산학보』4, 1968)
  • 「韓國櫛文土器の展開」(任孝宰, 『末盧國-佐賀縣唐津市·東松浦郡の考古學的 調査硏究-』, 1981)
  • 「朝鮮櫛目文土器の硏究」(有光敎一, 『京都大學考古學叢書』3, 1962)
  • 「朝鮮櫛目文土器の硏究」(有光敎一, 『京都大學考古學叢書』3, 1962)
  • 「櫛目文土器の分布に就いて」(藤田亮策, 『靑丘學叢』2, 1930)

    [네이버 지식백과] 빗살무늬토기 [─土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8256&cid=46619&categoryId=46619

  α ũϱ
신석기시대
īī丮 Ʈ  ̽      2016/12/28 18:02
https://cafe.fmebs.com/blog_blog/postview.asp?b_id=didqhdls1186&idx=657 
 

구석기 ·중석기 시대에 이어지며 금속기시대에 선행한다.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인류는 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문명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용기로서 토기가 발명되었고, 농경 ·수렵 ·벌채용의 도구로 간석기[]가 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 본문 이미지 1 

바구니 제작, 방직기술이 나타났고,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라 촌락을 만들게 되어 원시적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 신앙,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말기에는 지역에 따라 자연동()을 사용, 도구를 만들게 되어 금석병용() 시기로 접어든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생산경제는 이후 고대 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종전에는 토기와 간석기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농경단계에 들어와서도 토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라크의 자르모 문화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토기 사용이 반드시 신석기 경제단계와 일치된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의미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농경 ·목축에 의한 생산경제 단계를 이룩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선무늬토기[]문화라 하여 ‘신석기 A군()문화’라 부르는 데 대하여,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시베리아 ·몽골 ·만주 ·한국 북부 등지로 연결되는 빗살무늬토기[]문화 지역은 아직 농경 ·목축의 생산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채집 ·수렵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삼은 이른바 획득경제단계에 있었다. 이 지역은 서남아시아 선진 신석기문화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경 ·목축이 부적당하여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문화를 ‘신석기 B군()문화’라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석기시대 [New Stone(Neolithic) Age, 新石器時代] (두산백과)


 

  α ũϱ
구석기 시대
īī丮 Ʈ  ̽      2016/12/28 17:59
https://cafe.fmebs.com/blog_blog/postview.asp?b_id=didqhdls1186&idx=656 
 

정의

선사시대의 시기구분상 인간이 간석기〔〕를 생활도구로 사용한 시대.

개관

석기시대의 시대구분상 구석기·중석기시대를 이어 나타난 마지막 단계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늦어도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인 홍적세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 홍적세는 기후 변동이 심해 빙하기와 간빙기가 되풀이되었고, 그에 따른 해수면의 변동과 동식물의 분포 변동이 잦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약 1만년 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기후의 극한 변동은 대체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양극지방의 두꺼운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툰드라지역이었던 곳은 삼림지대로 바뀌었고 기후는 전반적으로 보다 온난다습해졌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라 하면, 바로 이 후빙기의 새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을 하게 되어, 그 배경으로 인류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를 말한다.

아주 오랜 기간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경제를 벗어나, 농경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면서 토기 및 간석기를 사용하고 직물기술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문화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실로 인류문화발달사상 새로운 전기를 이룩한 것이었다. 하지만 후빙기 이후의 세계 모든 지역에서 똑같은 농경을 기반으로 한 문화들이 전개된 것은 아니다. 유라시아나 극동아시아 등지에서는 농경이 실시되지는 않았으나, 앞서 말한 신석기적 특성을 지닌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 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문화도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간석기와 토기 등 신석기적 문화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유럽 중심의 개념보다는 넓은 의미로 정의되는 신석기시대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홍적세 이후 최초의 토기 출현으로부터 금속기 사용 이전까지, 주로 어로·수렵·채집에 의해 전개된 토기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다.

한국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문화로 빗살무늬토기문화를 들 수 있다. 토기의 모양은 밑이 뾰족한 포탄형을 하고 있는 것과 밑이 납작한 항아리나 화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토기표면에 무늬를 장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무늬는 빗같이 생긴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누르거나 새겨서 생긴 선 또는 점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무늬모양이나 그릇의 형태가 북방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k)이나, 바이칼 지방, 소련의 연해주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토기들과 유사성이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토기는 캄케라믹이 시베리아를 거쳐서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기라는 명칭도 캄케라믹을 그대로 번역한 데서 유래되었다. 지금까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한반도내 유적은 약 130개소 정도이며 주로 큰 강가·해안·호숫가·섬 등에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은 분포양상만을 보아도 당시 생활이 고기잡이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 유적에서 낚시바늘이나 어망추가 많이 발견되는 점은 다시 이러한 사실을 뚜렷하게 뒷받침해 준다. 한편, 석창이나 돌살촉과 같은 수렵구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수렵에 의한 식량확보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나무열매나 뿌리 등의 채집도 보조수단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인들은 물가의 평평한 사질퇴적지 또는 물가에 가까운 산 경사면에 땅을 파고 들어간 구덩주거지(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주거지가 발굴 조사된 암사동의 경우 4∼5채 정도가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주로 어로 및 수렵·채집에 의존해 전개되었던 신석기문화가 말기에 접어들자, 서해안의 일부지역에서는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 화북지방의 농경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후기의 농경을 입증하는 유적은 아직 1∼2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매우 한정된 지역에 국한된 맹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한국 신석기문화는 어로·수렵·채집에 의해 전개된 문화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는 서기전 63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석기가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전기에 앞서 개시기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고산리유적의 유물들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구석기시대가 끝난 이후 서기전 5000년 무렵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해당하는 확실한 자료도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방사성탄소연대로 측정한 결과, 가장 오래된 서기전 5000년경의 강원도 양양 오산리 하층, 부산 동삼동 하층과 가장 늦은 서기전 1000년경의 경기도 시도유적()을 통해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서기전 5000년경부터 서기전 1000년경까지 약 4000년간 존속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전 1000년 전후에는 본격적인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된 청동기문화의 융성으로 신석기문화의 대부분은 강력한 청동기문화에 그대로 흡수·동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일부 도시지방에서만 그 뒤에도 신석기적 요소를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유물 분포지역

토기는 한국 신석기문화를 규정하는 기준이 될 만큼 다른 어떤 종류의 유물보다도 신석기문화의 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기의 제작과정이나 무늬의 종류는 각 지역, 각 시기의 문화나 사회적 배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므로, 신석기 편년구명에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유적은 주로 동·서·남해안의 세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뚜렷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지역별 토기의 변천양상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전체적인 편년을 보기로 한다.

1. 서해안 지역

한반도 서해안의 대동강·한강 유역과 인접도시에서는 뾰족밑을 기본으로 하는 포탄형의 토기가 이 지역 전통을 이루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토기를 만들기 위해 반죽한 점토에는 운모·석면·활석 등을 섞기도 한다. 무늬는 점과 선에 의한 기하학적 형태가 많다. 무늬의 구성방식은 토기 표면을 위로부터 평행으로 각각 구연부()·기복부()·저부()로 삼등분해 서로 다른 무늬로 장식한 것, 같은 무늬로 장식한 것 또는 부위에 따라 무늬가 생략된 것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구연부 무늬로는 짧은 사선을 평행으로 여러 줄 돌린 것이 가장 많고, 기복부 무늬로는 사선으로 물고기뼈무늬〔〕를 나타낸 것이 가장 많다. 이와 같은 전통을 지닌 토기류를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는 다시 부위별 무늬의 생략 여하에 따라 전시문형()의 Ⅰ류, 저부무늬 생략형의 Ⅱ류, 기복·저부무늬 생략형의 Ⅲ류로 세분된다. Ⅰ류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서울 암사동유적의 경우,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4280±110년, 4100±105년으로 서해안지역 최고의 연대를 나타내며 신석기 전기에 해당된다. Ⅱ류가 주류를 이룬 경기도 소야도조개더미〔〕의 경우, 서기전 1910±42년의 측정결과가 나왔으며, Ⅲ류가 출토된 시도조개더미의 측정치는 서기전 1090±60년으로 나와 각각 서해안 신석기시대의 중기와 후기에 해당되고 있다.

2. 동해안 지역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유역과 강원도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동해안지역에는 납작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토기가 그 지역 전통을 이루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무늬는 토기의 상반부에만 새긴 것이 많으며, 그 종류로는 물고기뼈무늬 외에 번개무늬 같은 특징적인 것도 있다. 근래에는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양양 오산리유적에서 평저유형의 토기류가 출토되어 이 지역이 동북지방과 동일한 전통의 지역문화권을 이루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적의 퇴적상태는 크게 상층·중층·하층의 3개층으로 구분되는데, 하층에서 채집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5100±120년으로 나와 한반도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이고 있다. 한편, 오산리의 중층 및 상층의 연대측정치는 없지만, 중기 및 후기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 남해안 지역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유역과 해안지역에서는 서해안이나 동해안지역과 비교해 각각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토기형식이 혼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덧무늬토기〔〕·지두문토기()·영선동식토기()·태선어골문토기()·겹아가리토기〔〕등이 각각 층서별로 주류를 이루며 나타난다. 그 대표 유적인 동삼동조개더미의 경우, 최하층 조도기()에서는 원시민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 2층의 목도기에서는 지두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그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3940±140년이다. 3층의 부산기에서는 영선동식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2995±125년이다.

4층의 두도기에서는 태선어골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5층 영도기에서는 겹아가리토기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곳의 방사성탄소연대는 서기전 1450±120년이다. 이상의 각 지역별 편년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전기·중기·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구분

1. 신석기시대 전기

서기전 5000년경부터 약 1,500년 동안의 전기 신석기문화의 예로, 서해안지역에서는 전형적 빗살무늬토기 Ⅰ류가 주류를 이루는 유적들, 동해안지역에서는 구연부에만 무늬를 새긴 평저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오산리하층과 함경북도 서포항(西)Ⅰ을 들 수 있다. 남해안지역에서는 덧무늬토기와 원시민무늬토기의 조도기, 지두문토기의 목도기, 토기 상부에만 누른 무늬를 장식한 영선동식토기의 부산기로 대표된다. 서해안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 Ⅰ류는 구연부와 기복부에 각각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구연부에는 짧은 선을 아래위로 여러 줄 돌리고, 기복부에는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것이 압도적이다. 이러한 토기는 서울 암사동, 광주() 미사리·동막동유적 등 한강 중류지역을 비롯해 대동강변의 궁산리, 봉산 지탑리유적 등 한반도 서북한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한편, 동해안지역의 서포항Ⅰ, 오산리하층, 남해안지역의 조도기·목도기에서는 아직 빗살무늬토기의 표지적인 무늬인 물고기뼈무늬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해안지역을 제외한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의 물고기뼈무늬토기〔〕성행 이전의 시기를 선빗살무늬토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

전기 신석기인의 집자리가 발굴조사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포항,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유적, 남해안의 돌산 송도에서 발견된 주거지와 동삼동 3호 주거지 정도이다. 이들은 강안 또는 해안의 사질퇴적층이나 강안에 면한 경사면을 60㎝ 이상 파서 만든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주거지의 평면은 방형과 원형이 있으며, 20㎡ 내지 30㎡ 규모의 움집이 한곳에 4∼5채 모여 있음이 밝혀졌다. 움집 바닥에는 진흙을 깔고 굳게 다진 뒤 동물 가죽이나 짚을 깔고 살았다. 내부에는 음식 준비와 채난()에 필요한 화덕이 보통 1∼2개 있다. 그리고 큰 항아리의 밑부분을 떼어낸 것을 바닥을 파고 거꾸로 묻은 저장공이 있다.

또한, 출입을 위한 간단한 경사로나 계단시설도 마련되었다. 이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들은 재료에 따라 토기·석기·뼈연모〔〕로 구분할 수 있는데,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토기류이다. 토기는 테를 쌓거나 감아올리는 방법에 의해 성형한 뒤, 600∼700℃의 열을 가해 완성한 것이다. 열을 가할 때 토기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해안지역의 경우 운모나 활석·석면 등을 섞은 것이 있다. 그리고 동해안지역에서는 석영립이나 조개가루를 섞고 있으며, 남해안에서는 섬유질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석기류에는 뗀돌도끼〔〕·간돌도끼〔〕·석창·돌살촉 등이 있다. 돌도끼류는 정착생활에 필요한 필수도구로 벌목이나 목재의 세공 이외에 나무의 뿌리를 자른다든지 할 때에 널리 쓰인 도구이다. 한강변 암사동이나 미사리에서는 뗀돌도끼가 수적으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역석()에 횡위타격()을 가해 타원형의 격지〔〕를 떼어내고 그 주변을 타정()해 제작하였다. 석질은 특별히 일정한 것이 없지만, 현무암·규질점판암·혈암 등이 주로 쓰였다. 특히, 동삼동에서는 규질암제의 반간돌도끼〔〕가 출토되었다.

뼈연모는 재료 자체가 부식이 잘 되기 때문에 조개더미유적 이외에는 잘 남아 있지 않다. 동삼동조개더미에서는 녹각제 작살과 낚시바늘이 출토되어서 어로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암사동·미사리 등 한강유역의 유적에서는 석제 어망추가 다수 발견되어서 그물에 의한 고기잡이도 어로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로생활과 관련해 조개류 채집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된다. 동삼동의 경우 모두 31종의 조개류가 채집되었다. 그것은 현재 해안에서 잡히는 조개류의 거의 전부를 망라하는 셈인데, 특히 굴·전복·소라·우렁이가 많다. 이 중 전복과 소라는 깊은 물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잠수 기술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신석기시대 전기는 주로 어로생활에 전념하면서 수렵이나 채집활동을 병행했던 어로·수렵사회적 성격을 가진다.

2. 신석기시대 중기

신석기시대 중기에는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 빗살무늬토기에 변화가 생겨 시문 면적이 줄어든 구분계 저부문 생략형 토기와, 기복부에 전용 시문되던 물고기뼈무늬가 구연부에까지 시문된 동일계 빗살무늬토기가 성행한다. 동해안 및 서해안지역에서는 물고기뼈무늬가 성행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서기전 3,500년경에서 2,000년경까지 약 1,500년 동안이다.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서해안지역에서는 구분계 저부문 생략형과 동일계 저부문 생략형 토기를 주체로 하는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이 있다. 동해안지역에서는 서포항Ⅱ기층, 그리고 남해안지역에서는 두도기가 있다. 중기 신석기인들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움집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가 되면 유적 수도 증가하며 개별 주거지의 구덩 깊이도 깊어지고 평면도 원형·방형·장방형으로 다양해진다. 최근 조사된 인천 삼목도, 영종도 중산동·운서동, 시흥 능곡, 안산 신길, 용인 농서리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런 마을 유적에서는 기둥이 4개인 방형 주거지가 20동 이상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구조는 돌출식 또는 복도식 출입구가 정연하게 만들어졌다. 생활도구나 생활경제에서도 전기와 큰 차이가 없다. 아직 농경 이전 단계의 어로·수렵에 의존한 사회에 해당된다.

3. 신석기시대 후기

신석기시대 후기는,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 빗살무늬토기가 퇴화되어 구연부에만 시문하게 되며,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서도 퇴화·변형되는 시기이다. 이는 서기전 2,000년에서 1,000년까지의 대략 1,000년간이다.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서해안지역에서는 기복부·저부문 생략형 토기가 출토되는 궁산리, 지탑리 상층 및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이 있다. 동해안지역에서는 굴포리 후기층, 그리고 남해안지역에서는 겹아가리토기와 구연부에만 국한해 시문하는 퇴화된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영도기이다. 이 시기 충청도지역에서는 대천리식 주거지라 불리는 대형 장방형 주거지가 나타나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영동지역에서는 방형 주거지가 유행하고 있으며 고성 철통리에서는 4주 및 2주식 방형주거지로 이루어진 마을유적이 조사되었다. 이밖에 경상남도 합천 봉계리 등지에서는 원형과 장방형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서해안지역에서 생업경제상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지탑리유적에서 피·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제 농경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리고 궁산리에서는 돌가래·뿔가래와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경구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후기에 들어서면 초보적 단계의 전작농경()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어로·수렵에 의한 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사와 전망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일본인 학자 토리이〔〕가 1916년 황해도 용반리유적, 경기도 시도조개더미 등을 조사함으로써 한반도 서해안지역에서 개시되었다. 그 뒤 후지타〔〕·요코야마〔〕·아리미쓰〔〕등에 의해, 1925년 암사동, 1930년 부산 동삼동조개더미, 1932년 동북지역의 유판조개더미〔〕등이 조사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윤곽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까지의 고고학 발굴조사는 주로 역사시대의 고분발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에 관한 것은 수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빈약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의 주된 관심은 한국의 선사시대 토기 중 주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와의 관계구명에 그 초점이 놓여 있었다. 이 두 종류의 토기문화 중 전자가 주로 해안이나 강가 그리고 도서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후자는 주로 내륙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점에 착안해, 이를 동일 인종의 같은 시대에 있어서 생활양식상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빗살무늬토기가 북한지역에 편중된 반면에 민무늬토기가 남한지역에 편재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지역적 차이에서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려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이 두 종류의 토기문화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려는 견해와는 달리, 양자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었다. 그 예로 후지타, 요코야마의 예를 들 수 있다. 후지타는 1930년에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가 북유럽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캄케라믹이 동쪽으로 전파되어 시베리아를 거쳐 유입된 것이라는 내용의 전파설을 제창하였다. 요코야마도 같은 견해로,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의 연해주지역→한국 동북지역→남해안지역→서해안지역의 방향으로 전파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신석기시대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단지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 두 종류의 토기형식만을 설정한 뒤, 설정된 내용의 범위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빗살무늬토기에 관해서도 개개의 유적이나 지역을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해 그 상호간의 선후관계 구명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연구양상은 빗살무늬토기 자체의 선후관계 구명에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 큰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광복 후,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유적 발굴조사가 개시되면서, 남한과 북한에서는 각각 신석기유적에 대한 대규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서해안지역에서는 궁산리·지탑리·암사동이, 남해안지역에서는 동삼동·수가리, 그리고 동해안지역에서는 굴포리 서포항, 양양 오산리유적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특히, 암사동·동삼동·서포항·오산리유적의 발굴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자체의 상호간 선후관계를 보여주는 층위적 증거가 제시되어 신석기시대의 문화변천 양상을 구명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남한지역 발굴조사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응용되어 이제까지 신석기시대에 관련된 것만 해도 50개의 측정연대가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광복 후의 신석기시대 연구에서는 층서관계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빗살무늬토기문화의 편년수립에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확한 편년의 수립 없이는 그 이상의 연구 폭을 넓히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편년상 진전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만, 아직도 해명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먼저 한국 신석기문화의 기원 및 형성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한반도에는 중석기 이후 사람이 살지 않고 있던 상태에서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한국의 신석기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광복 후 신석기유적에 대한 대규모 조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응용결과 약간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서해안지역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의 캄케라믹, 바이칼 지방의 토기와는 기형상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시문방법·무늬구성·제작방법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오히려 한반도 서해안지역의 지역적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토기문화로 생각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도 서기전 5000년대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에, 시베리아 바이칼 지방보다도 더 오랜 연대를 나타내는 셈이 된다. 더구나, 동해안지역의 오산리하층이나 동삼동의 조도기·목도기의 주체를 점하고 있는 덧무늬토기·지두문토기·원시민무늬토기 등은 전형적 빗살무늬토기의 범주에서 벗어난 토기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해안 및 남해안지역에만 존재하는 선빗살무늬토기문화나 서해안의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문화의 기원 및 형성 문제는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와 석기에서 보듯이,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초창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만큼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이과정에 대한 검토와 신석기시대의 시작 시기와 문화상에 대한 문제도 향후 밝혀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는 움집으로서 4∼5채를 단위로 하는 정착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데, 원시농경이나 목축과 같은 안정된 식량생산단계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수렵·채집 등의 낮은 생활수단에 의해 집단정착생활이 영위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조직은 어떠하였으며 주변지역의 고대 민족들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 등의 문제들도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광복 후 신석기시대의 편년수립은 그 나름대로의 의의가 크지만, 아직 층위적 근거가 약한 편이며, 토기 및 석기의 용도 문제 등도 또한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요한 과제들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제시된 여러 과제들이 앞으로 정밀한 학술발굴조사에 의한 기본자료의 축적과 인접 과학분야와의 협력 하에 해결되어 나갈 때, 한국 신석기문화의 양상은 보다 폭넓고 깊게 밝혀질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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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백과] 신석기시대 [Neolithic Age, 新石器時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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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īī丮 Ʈ  ̽      2016/12/22 16:34
https://cafe.fmebs.com/blog_blog/postview.asp?b_id=didqhdls1186&idx=652 
 

의사(醫師, 양의사, medical doctor, physician, surgeon)는 의학의 전문가로서 인체와 질병, 손상, 각종 신체 혹은 정신의 이상을 연구하고 진단,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수행한다.

「의료법」에 의하면 의료인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助産師)·간호사(看護師)로 나누고 있으며, 이중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에 종사함을 임무로 하고 있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의학사학위 또는 의무 석사 학위를 받은 자로서 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시험에 합격한 다음 보건복지부장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 다만 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영주권

을 얻은 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그 면허를 얻을 수 있다.

분류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하여 의사면허를 받은 의사직의 대다수는 크게 기초연구의사와 임상의사의 두가지 방향으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외에도 보건행정가를 포함한 경력군이 존재한다.

기초의사

기초의사는 기초의학 분야(생화학, 분자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기생충학, 미생물학, 면역학, 약리학, 예방의학 등)의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에 종사한다. 대부분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에 소속되어 있다

임상의사

임상의사는 임상의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환자 진료와 교육, 연구에 종사한다. 대한민국의 의료법에 따라 의사가 임상의사로서 진료를 하려면 의원, 병원, 종합병원 등의 의료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의사는 전반적인 의학분야에 걸쳐 연구와 진료를 수행할 수 있으나 특정 질환군이나 환자군, 혹은 특정 치료분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전자의 경우 일반의사, 후자의 경우 전문의사라 불린다.

일반의사

일차 진료에 필요한 의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여러 환자에 대한 일차 진료를 주로 하게 된다.

전문의사

특정 분야에 대해 추가적인 수련을 받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를 말한다. 현재 대한민국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에 규정된 임상의학의 전문과목은 다음과 같다.[ㄱㄴㄷ순][1]

위의 전문과목에 대한 수련을 받고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도 전문과목 내의 특정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위한 수련([임상강사 혹은 펠로우(fellow) 과정]을 받는 경우가 있으며, 과정을 마치고 각 학회 주관의 인증 시험 등을 마치는 경우, 세부전문의 혹은 분과전문의로 인증을 받으나, 의료법에서 보호받는 인증은 아니다.

교육과 수련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6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4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의무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가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보건복지부장관이 발부하는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며, 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의사가 된 후에도 추가적인 수련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 기초의학자가 되기 위한 수련과 전문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가장 활발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초의사

기초의사의 경우 주로 대학의 기초의학교실에서 조교로서 수련을 받으며, 학부생 교육 및 교수 연구에 참여하며 수련을 받게 된다. 병리학교실, 약리학교실의 경우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기도 한다.

임상의사

임상의사의 경우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대표적이다. 이 수련과정은 보건복지부령에 의해 지정된 수련병원 또는 수련기관에서 이루어진다. 공식적으로는 가정의학과를 제외한 전공의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1년간의 수련의 과정을 수료하여야 하나, 대부분의 경우 가정의학과도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전공의 과정을 밟는다.

의사의 경우 가정의학과, 결핵과,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3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며, 그 외의 임상과들은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련의 과정은 임상과를 두루 순환하며 각 과에서 임상적 경험을 쌓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해당 학회가 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며,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면 전문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전문의가 된 뒤에도 해당 임상과에서 더 좁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임상강사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이 과정은 1년 혹은 2년 단위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정해진 기간은 없다

위의 과정 외에도 각 학회에서 제공하는 여러가지 교육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며, 때로는 수련병원 혹은 수련기관이 아닌 의료기관에서 다른 의사에게 개인적으로 수련을 받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수련을 마쳐도 특별한 자격이나 면허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미국의 의사 (MD / DO)

미국에서는 의사를 MD또는 DO라고 부르며 직역을 하면 의학박사가 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통상적인 의미의 의학박사 즉 의학Ph.D와 많은 개념적 혼란을 일으킨다. 미국에서 4년제 일반학부 졸업후 메디컬 스쿨(의학전문대학원)에서 4년의 의학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자동으로 받는 학위가 MD나 DO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취득한 의사들도 스스로를 MD라고 지칭하는 것이 관행화돼있다.

군의관

대한민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병역 대상 남성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수련을 받고 싶다면 의무사관후보생이 되며, 추후 몇가지 형태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게 된다. 하지만, 의과대학 졸업 후 반드시 의무사관 후보생이 되는 것은 아니며 수련을 받지 않는다면 일반병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의무사관 후보생중 군의관을 선발하고 남는 자원이 공중보건의가 되게 된다. 의사면허 취득 이 후 의사경력이 3년 이하 일 경우 중위로 임관하며, 2012년 현재 인턴 중도포기자, 인턴 수료 후 전공의 과정에 입문하지 못한자, 전공의 과정을 중도에 포기한자 등이 해당이 된다. 의사경력이 3년이상이거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는 대위로,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임상강사(펠로우) 과정을 수료한 의사는 대위임관하며 2개월의 군사훈련과 2주의 특기훈련 후 36개월간 복무하게 된다.

공중보건의사

[2]의 신분으로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이등병으로 전역되며 이후 기존 4주훈련 포함 3년 간 공무원[3]의 신분이 되어 공중보건의사로 대체 복무하게 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수련을 받지 아니하고 공중보건의에 지원한자, 의무사관후보생이나 군의관을 선발되지 않은 자 등이 해당이 된다. 비록 신분은 병이지만 급여는 육군 중위에 준하게 받는다.

스포츠

어떠한 스포츠이든 국제규모의 대회에서는 경기장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의사가 반드시 대기하게 된다. 특히 이종격투기, 권투, 프로레슬링 등 매우 격렬한 투기종목의 경우 아예 '링 닥터(Ring Doctor)'라는 전속 의사를 둔다. 링 닥터는 선수의 몸상태를 파악하여 직권으로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는데 이를 닥터 스톱(Doctor Stop)이라 한다.

의사의 주의의무와 설명의무

의사가 환자에 대해 지는 사법상의 의무는 의학상의 기준에 따라 진단과 치료를 행할 의무("진료상의 주의의무")와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함으로써 진단검사나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진료과정에서 피할 수 있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할 의무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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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곰의 신체구조
 수술할때 왜 뜨거운물로 손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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